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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当作人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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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http://baike.baidu.com/view/4770.htm 의 내용을 직접 번역, 편집한 내용입니다)

춘추오패(춘추5, 春秋五霸)

배경: BC770부터 BC476년까지 290 년에 이르는 춘추시대는 전란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노나라 역사서 <춘추春秋>에만 기록된 전란이 무려 480 차례에 이를 정도이다. 사마천은 춘추시대에 군주 시해는 36차례 발생했으며 왕조의 멸망은 52차례에 달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도피한 사례는 부지기수라고 했다. 이런 혼란 속에 춘추시대 초기 140 개에 달하던 왕조가 병합을 거치면서 소수만 남게 된다. 소수의 대국간 패권 다툼이 발생하고 패권을 차지한 자가 주나라 천자를 받들고 천하를 호령하게 된다. 춘추시대에 이런 강력한 패자를 가리켜 춘추오패라고 한다.

제환공齊桓公

BC685년에 즉위한 제환공은 재상 관중, 포숙 등을 중용해 정치·경제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해 제나라를 안정시키고 천하 제후를 호령하는 최초의 패자가 된다. 관중이 제안한 존왕양이尊王攘夷 내걸고 제후를 단결시켜 외적에 대항했으며 중원을 노리던 남방 강국 초나라를 저지함으로써 위명을 떨쳤다. 환공은 채구蔡丘 회맹을 통해  패자지위를 인정받는다.

진문공晉文公

제환공에 이어 패자가 이는 진문공이다. BC633 초나라 성왕成王 초나라·정나라·진나라 연합군과 함께 송나라 도읍인 상구商丘(하남성 상구현 河南省商丘縣) 침공하자 진문공은 송의 원군요청에 응해 제나라·진나라를 포섭해 세력을 키우는 한편 ·위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초나라를 고립시킨다. 이에 초나라 영윤令尹 자옥子玉 대노하며 진나라를 공격한다.

진문공은 초나라의 예봉을 피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단 부대를 90 후퇴시킨다. 당시 30리를 1一舍 했으니까 삼사三舍 후퇴한 것이다. 진나라가 삼사 후퇴退避三舍 다시 위나라 성복城濮(산동성 폐현憋縣)까지 후퇴했다. 성복은 진나라와 인접해 있어 보급이 용이하고 진나라·제나라·송나라 원군과 회합하기 적당한 지역이었다. BC632 4 진나라와 초나라 양군이 결전을 벌였는데 진나라가 초나라 군을 유인해 고립시켜 전멸시켰다. 성복전투는 군사학적으로 먼저 후퇴를 하여 양보를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을 선보인 사례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후 진문공은 주양왕周襄王 제후를 전토踐土(하남성 광무光武) 초청하여 회맹을 가진다. 이때 주천자는 진문공에게 후백侯伯 직위를 하사하고 자유로이 정벌을 있는 권리를 부여하면서 패자 지위를 인정했다.

송양공宋襄公

주양왕周襄王 13(BC 639) , ·제·초 군주가 제나라의 녹지鹿地 모여 회맹을 가졌다. 제환공 사후 줄곧 패자의 지위를 노리던 송양공은 자신이 회맹 개최 맹주 신분인데다가 작위 역시 초나라나 제나라보다 높기 때문에 패자는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성왕은 송양공을 억류한 군대를 몰아 송나라 영토를 침략한 풀어주었다. 송양공은 조급함과 허명 뿐인 인의만 외쳤기에 패자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물론 신용을 지키고 인의로써 사람을 대하였기 때문에 패자로 봐야한다는 관점도 있으나 진정한 패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초장왕楚莊王

초나라는 제환공이 패자일 중원진출을 시도하였으나 저지당한 동쪽(중국 동남부)으로 진공, 여러 소국을 병합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제나라가 몰락하자 초나라는 나라와 패권을 경쟁했다. BC598 초장왕은 (하남성 정주郑州)에서 진나라와 결전을 벌여 대승하였고, 초장왕은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진목공秦穆公

나라가 패자일 때 서쪽의 진나라 역시 강성해졌다. 진목공은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자를 노렸으나 진이 있어 서쪽 10여 소국을 병합하여 함곡관函谷關 서쪽 일대에서 패권稱霸西戎을 행사했다. <한비자·십과편韓非子·十過篇>에 따르면 당시 12개국을 병합하고 1000여리의 영토를 개척했다兼國十二,開地千里고 한다.

오왕 부차·월왕 구천 吳王夫差 越王勾踐

춘추 말기 오나라와 월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중국 동남부에서 패권을 다투었다. BC494년 오왕 부차는 월나라를 침공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구천을 생포하면서 월나라를 굴복시킨 후 제나라를 공략, 패배시켰다. BC482년 황지黃池에서 회맹을 갖고 패권을 차지했다.

월왕 구천은 오왕 부차에 패해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와신상담한 끝에 오나라를 멸하고 제나라·진나라와 서(산동성 등현滕縣)에서 회맹을 갖고 패자가 되었다.

종합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는 주왕실의 권위가 약해졌을 때다. BC 770 주평왕周平王 도읍을 낙읍洛邑(하남성 낙양洛陽)으로 동천한 후에는 주왕실 국력이 더욱 기울었다. 과거에는 천자가 제후를 통솔하며 직접 정벌을 하였지만 동천 이후에는 제후이 직접 정벌을 하는 처지가 것이다. 신흥지주 계급이 권력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주나라의 노예제 역시 붕괴 직전까지 내몰리게 된다.

패자의 상징은 바로 제후들을 회맹에 참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룬 제환공齊桓公 강소백姜小白, 진문공晉文公 희중이姬重耳, 초장왕楚莊王 미려羋旅, 오왕吳王 부차夫差, 월왕越王 구천勾踐 다섯 제후가 진정한 춘추오패春秋五霸 인정받고 있다.

송양공宋襄公 과대망상에 빠져 초나라의 권위로 제후를 회맹하려 했으나 패자가 되기는커녕 되려 궁지에 빠졌으니 언급할 가치가 없다.

반면 주왕실 붕괴를 막은 정장공鄭莊公 춘추 1패자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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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XINGXING 生当作人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