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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隔海相望之邦/通古今之變'에 해당되는 글 22

  1. 2009/12/17 001. 진시황秦始皇(6)
  2. 2009/12/07 001. 진시황秦始皇(5)

당시 대장군大將軍 백기白起 활약으로 강역을 크게 넓혀나가던 진나라는 소왕昭王 고령과 병마에 시달리면서 왕위 계승 문제로 상황이 다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안국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지만 안국군의 정실이자 태자비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아들이 없어 측실 소생 왕자를 태손太孫으로 책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여불위가 함양에 등장했다.

진나라의 상황과는 별개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도박을 던진 여불위는 직접 돌파보다는 우회전술迂回戰術이 훨씬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단 화양부인의 언니와 남동생을 찾아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진상進上하고 환심을 샀다. 어느 날 여불위는 만약 다른 마마의 공자님이 후사가 될 경우 마마님 일가는 그 총애는 커녕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라며 겁을 주었다. “그럼 어떡해야 하오?”라는 화양부인 언니와 남동생의 반응에 여불위는 조나라에 인질로 있는 이인을 그들에게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인이 조나라에서 자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한데다가 시서詩書에 밝고 품성이 방정하여 한단 사람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소개했다.


지난 몇 년간 이인이 한단
邯鄲에서 보여준 행적들이 이미 진나라 궁중에 상세히 전해진 덕분에 그들도 여불위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현재 화양부인께서 필요하신 공자는 바로 이인 공자입니다. 이인 공자는 매번 화양부인은 내 친모親母보다도 날 더 아껴주시니 정말 하늘과도 같은 분이시오라며 눈물을 훔치실 뿐 아니라 아니라 각국 빈객賓客들에게도 내 함양咸陽에서 가장 생각나는 이는 딱 세 사람뿐으로 조부祖父이신 주공主公, 부친父親이신 안국군 전하, 그리고 화양부인이라오. 만약 화양부인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나, 이인도 없었을 것이오.’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이자 일단 화양부인께서 이인 공자를 양자로 들이신 후 안국군께서 후계자로 정하시면 훗날 필시 부인 가문의 대은대덕大恩大德에 감읍할 것이니 부인 가문의 앞날은 탄탄대로 뿐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그들은 화양부인을 설득해 여불위의 묘책대로 일을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화양부인은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그 고운 자태와 미소는 여전했다. 그 뇌쇄적인 매력으로 진나라 궁중에서 상당히 높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미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진소왕秦昭王 조차도 안국군에게 내 너를 태자로 삼은 것은 전적으로 태자비太子妃 때문이니라.”라고 하였고, 화양부인의 시어머니가 되는 진 소왕의 왕후王后는 그녀를 자신의 친딸처럼 아낄 정도였다.

그토록 왕실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화양부인도 후사後嗣가 없어 근심이 그치질 않았으나 여불위의 묘책을 듣고는 무거운 짐을 덜어놓게 되었다. 화양부인은 조나라에서 전해지는 이인의 활약상은 저나 태자 전하도 잘 알고 있는데다 왕후 마마께서도 그 아이를 자랑스러워 하시니 윤허해 주실 듯 하오.”라고 했다.


우선 남편인 태자 안국군과 상의를 했으나 안국군이 다소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화양부인은 왕후를 배알하고 의견을 구했다. 화양부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왕후는 이 일은 내가 직접 전하께 아뢸 것이다. 이인 그 아이는 수년간 인질 노릇을 하며 견문을 넓히고 단련을 했으니 최상의 후계자 감이라 생각되는구나.”라고 말하고 바로 소왕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왕후와 화양부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소왕은 즉각 안국군을 불러들여 이인을 후계자로 확정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이인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여불위도 입궁하라 한 후 친히 접견하여 천하통일의 방책
方策을 물어보았다. 천하경륜天下經綸 방책을 차분하고 정확하게 진언進言하는 여불위를 본 소왕과 안국군은 그의 높은 식견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그가 단순한 장사치가 아니라 천하의 형세를 통찰한 일국의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책임질 걸출한 인물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즉시 이인의 스승으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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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에게는 미모가 뛰어나고 가무금기歌舞琴棋에 능한 조희趙姬라는 첩실이 있었다. 이인은 과거 제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연을 맺었던 여인이 있었지만 제나라를 떠나면서 남남이 되었다. 배필이 없는 20대 초반의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인 이인 앞에 천하절색天下絕色 조희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인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본 여불위는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고향에 처첩妻妾이 있었고 상단을 이끌고 각 지역에 갈 때마다 항상 현지 여성을 거두었기 때문에 여자가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한단邯鄲의 거리에서 노래로 생계를 유지하던 조희는 그 출중한 미모 때문에 특히 애지중지하던 애첩이었고 이인이 조희를 마음에 둔 그 순간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밴 상태라는 점이 고민이 되었을 뿐이다. 여불위는 과연 인물은 인물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투자해 천하를 경영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밴 애첩도 투자 카드로 활용하기로 한다


어느 날, “나와 함께했던 지난 날이 어떠하더냐?”라고 여불위가 묻자 조희는 소첩, 일생에 대인만 계시면 되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네 그릇이 그것 밖에 되지 않더냐! 내 너에게 왕후를 안겨주면 어떠하겠느냐?”라 여불위가 되물었고 말씀 드린 대로 전 대인만 원할 뿐 왕후 같은 것은  싫사옵니다라고 조희가 대답했다.


조희의 반대가 생각보다 완강하자 여불위는 자신의 탁월한 말솜씨를 발휘하여 조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왕
秦王의 나이가 70여 세로 고령高齡이기 때문에 태자인 안국공이 조만간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점, 이인이 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만약 이인에게 시집을 가면 조만간 왕후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짚어주었다. 여불위를 떠나기 싫어 눈물을 흘리던 조희는 여불위를 위해 이인에게 시집은 가지만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여불위가 자신을 품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여불위는 당연히 조희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일단 자신의 대업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조희 설득에 성공한 여불위는 다음 관문을 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2단계 작업은 바로 우연을 가장해 이인과 조희를 하나로 엮는 것이었다.


여불위 처소 사람들이 모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어느날 오후, 이인은 조희를 품고 싶어 안달을 하다 어렵사리 그녀를 유혹해 함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여불위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자신의 애첩을 건드렸으니 이제 어찌할 셈이냐며 크게 꾸짖는 여불위 앞에 이인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조희를 맡겨준다면 정말 아껴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의외로 쉽사리 이인과 조희를 엮는데 성공한 여불위는 속으로 회심의 쾌재를 부르며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인과 조희의 혼례는 한단성 내 각국 공자들의 축하 속에서 거행되었다. 그토록 품고 싶던 조희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이인은 여불위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믿고 따랐다.


한단에서의 2단계 공작까지 마친 여불위는 다음 공작인 이인, 태자
太子 만들기을 위해 진나라의 도성인 함양咸陽으로 향했다. (다음편에 계속^^)


(좌측사진설명) 진갱유곡秦坑儒谷

기원전 213,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분서焚書를 명하니 『진기秦記』ㆍ의서醫書ㆍ점술서ㆍ농업서적 이외의 수많은 고적古籍들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분노한 선비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고 진시황은 이런 반대 여론이 통치에 불필요하다고 판단, 갱유坑儒를 명하니 460여 명에 달하는 유생들이 함양咸陽에서 생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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