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에게는 미모가 뛰어나고 가무금기歌舞琴棋에 능한 조희趙姬라는 첩실이 있었다. 이인은 과거 제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연緣을 맺었던 여인이 있었지만 제나라를 떠나면서 남남이 되었다. 배필이 없는 20대 초반의 한창 혈기왕성한 청년인 이인 앞에 천하절색天下絕色인 조희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인의 이런 마음을 꿰뚫어 본 여불위는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고향에 처첩妻妾이 있었고 상단을 이끌고 각 지역에 갈 때마다 항상 현지 여성을 거두었기 때문에 여자가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한단邯鄲의 거리에서 노래로 생계를 유지하던 조희는 그 출중한 미모 때문에 특히 애지중지하던 애첩이었고 이인이 조희를 마음에 둔 그 순간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밴 상태라는 점이 고민이 되었을 뿐이다. 여불위는 과연 인물은 인물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투자해 천하를 경영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을 밴 애첩도 투자 카드로 활용하기로 한다.
어느 날, “나와 함께했던 지난 날이 어떠하더냐?”라고 여불위가 묻자 조희는 “소첩, 일생에 대인만 계시면 되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네 그릇이 그것 밖에 되지 않더냐! 내 너에게 왕후를 안겨주면 어떠하겠느냐?”라 여불위가 되물었고 “말씀 드린 대로 전 대인만 원할 뿐 왕후 같은 것은 싫사옵니다”라고 조희가 대답했다.
조희의 반대가 생각보다 완강하자 여불위는 자신의 탁월한 말솜씨를 발휘하여 조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왕秦王의 나이가 70여 세로 고령高齡이기 때문에 태자인 안국공이 조만간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점, 이인이 태자가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만약 이인에게 시집을 가면 조만간 왕후가 될 수 있다는 점 등을 짚어주었다. 여불위를 떠나기 싫어 눈물을 흘리던 조희는 여불위를 위해 이인에게 시집은 가지만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여불위가 자신을 품어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여불위는 당연히 조희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일단 자신의 대업을 위한 첫 번째 관문인 조희 설득에 성공한 여불위는 다음 관문을 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2단계 작업은 바로 우연을 가장해 이인과 조희를 하나로 엮는 것이었다.
여불위 처소 사람들이 모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어느날 오후, 이인은 조희를 품고 싶어 안달을 하다 어렵사리 그녀를 유혹해 함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고 있는데 여불위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자신의 애첩을 건드렸으니 이제 어찌할 셈이냐며 크게 꾸짖는 여불위 앞에 이인은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조희를 맡겨준다면 정말 아껴주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의외로 쉽사리 이인과 조희를 엮는데 성공한 여불위는 속으로 회심의 쾌재를 부르며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인과 조희의 혼례는 한단성 내 각국 공자들의 축하 속에서 거행되었다. 그토록 품고 싶던 조희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이인은 여불위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믿고 따랐다.
한단에서의 2단계 공작까지 마친 여불위는 다음 공작인 ‘이인, 태자太子 만들기’을 위해 진나라의 도성인 함양咸陽으로 향했다. (다음편에 계속^^)
(좌측사진설명) 진갱유곡秦坑儒谷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이사李斯의 건의를 받아들여 분서焚書를 명하니 『진기秦記』ㆍ의서醫書ㆍ점술서ㆍ농업서적 이외의 수많은 고적古籍들이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분노한 선비들의 엄청난 반대에 직면했고 진시황은 이런 반대 여론이 통치에 불필요하다고 판단, 갱유坑儒를 명하니 460여 명에 달하는 유생들이 함양咸陽에서 생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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